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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홍빛 짙은 붉은상사화. 남도의 절집을 중심으로 피어나 초가을을 아름답게 묘사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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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한기까지 느껴진다. 한낮에는 아직 덥지만, 그 햇살이 뜨겁다는 느낌은 없다. 여행하기에는 좋은 날씨다. 연휴를 이용해 남도땅 영광과 함평으로 간다. 지난 10일의 이야기이다.
다른 지역과는 풍경이 색다르다. 누렇게 물들어가는 남도의 초가을 들녘에 선홍빛깔이 더해지고 있다. 기다란 연초록의 꽃대에 붉은 꽃이 피었다. 생김새가 흡사 왕관 같다. 상사화와 꽃무릇이다. 도로변에도, 논둑에도 빨갛게 피었다. 그 풍경이 아름답다.
꽃이 피는 지금 잎을 찾아볼 수 없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다.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바로 그 꽃이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꽃이다. 둘 다 잎이 없는 채로 솟아 오른 꽃대 위에 꽃을 피우는 것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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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노랑상사화. 여러 상사화 가운데 하나로 진노랑색을 띄고 있다. 8월에 주로 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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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상사화가 활짝 피면 연초록의 초원에 빨강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다. 레드 카펫이 따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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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상사화, 왜 절 근처에 많이 필까?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아나고 여름에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꽃 색깔은 주로 연분홍이나 노랑색이다. 반대로 꽃무릇은 초가을에 꽃이 잎보다 먼저 피어난다. 색깔은 아주 붉은 진홍색이다. 이렇게 잎은 꽃을, 꽃은 잎을 서로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어서 '상사화(相思花)'로 불린다.
꽃 모양과 색깔에 따라 상사화, 붉노랑상사화, 진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백양꽃, 붉은상사화(꽃무릇)로 구별된다. 백양꽃은 백양사에서 처음 발견돼서 백양꽃이다. 위도상사화는 위도에서 처음 발견돼서 그리 이름이 붙여졌다. 초가을인 지금 많이 피는 것은 대부분 붉은상사화, 즉 꽃무릇이다.
이 꽃은 대부분 절집에서 군락을 이룬다. 영광 불갑사와 함평 용천사만 봐도 그렇다. 고창 선운사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절집에 많이 핀다. 생김새나 빛깔이 선홍빛으로 강렬하게 유혹하는 꽃이다. 절집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절집을 중심으로 많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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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의 돌탑. 젊은 스님과 아리따운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닌, 서로를 배려하는 참사랑을 기원하고 있는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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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 대웅전. 보물 제830호로 지정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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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가 절집에 많이 피는 데 대하여 유래하는 전설이 있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짝사랑과 연관된다. 옛날에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다. 젊은 스님이 그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짝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스님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 스님의 무덤에 피어난 꽃이 바로 상사화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출가한 스님을 그리던 처녀의 혼이 붉게 타오른 것이란 전설도 있다. 하여,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참사랑'으로도 불린다.
현실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 꽃의 알뿌리가 머금고 있는 독성에서 찾아야 한다. 옛날에는 이 뿌리가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식품으로 쓰였다. 당시 알뿌리에 함유된 녹말을 걸러서 죽을 끓였는데, 알뿌리에 들어있는 독소를 걸러내려면 시간이 꽤 걸렸다. 이것을 참지 못하고 죽을 쑤어 먹으면 배탈이 나기 일쑤였다. "자발스런 귀신은 무릇죽도 못 얻어먹는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
이렇게 독성이 있는 알뿌리를 찧어서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다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방부제 성분이 있어서다. 그래서 단청을 하고 탱화를 그리는 절집 주변에 많이 심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번져서 군락을 이뤘다는 게 가장 현실적인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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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의 개울을 따라 피어난 붉은상사화. 물에 비친 모습까지도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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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사 입구에 피어난 꽃무릇. 돌담과 어우러진 빨간 꽃이 더 애틋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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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축제 여는 사원최근에는 지자체에서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일부러 심기도 한다. 절집으로 오가는 도로변에도 심으면서 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 풍경이 사진작가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있다. 추석 연휴 때도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사진동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축제도 준비되고 있다. 영광 불갑사에서는 오는 19일부터 사흘 동안 '상사화 축제'를 연다. 상사화의 꽃말처럼 애틋한 설화를 재연한 연극이 공연된다. 상사화 향수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함평 용천사에서는 20일부터 이틀 동안 '꽃무릇 큰잔치'를 연다. 사물놀이와 초대가수 공연, 천연샴푸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이 곁들여진다.
축제가 열리는 때에 맞춰 가면 상사화와 꽃무릇이 연출한 절정의 황홀경을 맛볼 수 있다. 볼거리와 즐길거리는 덤이다. 꽃이 절정을 뽐내지는 않겠지만 축제 전에 찾아간다면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에서 여유롭게 꽃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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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 불갑사 범종루에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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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분홍 빛깔의 꽃무릇과 어우러진 산책로. 함평 용천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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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절집으로 가는 입구에서부터 만날 수 있다. 도로변과 평지는 물론 산자락과 개울 주변까지 눈을 두는 곳 어디라도 다 붉은 꽃물결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포인트는 불갑사 대웅전 뒤쪽의 저수지 주변이다. 저수지 물에 반영된 나무와 상사화의 붉은 색감이 황홀경을 연출한다.
절집도 매력 있다. 불갑사는 역사가 깊은 절집이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처음 지은 불법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창과 중수, 보수를 수없이 거쳤지만 나무와 기와지붕 하나까지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절집이다. 대웅전이 보물 제830호로, 참식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돼 있다.
선(禪) 명상 체험공원과 탑원도 볼거리다. 선 명상 체험공원은 보리수나무 밑에 맥반석과 자연석을 배치해 놓은 공간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을 했다는 데서 착안했다. 보리수는 또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성분을 내뿜는다. 여기에 앉아서 부처의 깨달음을 체험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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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의 선 명상 체험공원. 보리수나무 아래에 넓은 돌이 놓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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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갑사 입구에 우뚝 선 호랑이 조형물. 불갑산 호랑이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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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원은 작은 공간에서 중앙탑을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곳이다. 간다라 지역에 남아있는 탁트히바히 사원의 주탑원을 본떠서 조성했다. 마라난타 존자의 고향인 간다라의 대표적인 사원 양식이다. 이 체험공원과 탑원에서 주차장 쪽으로 상사화의 종류와 특성을 비교해 놓은 전시포도 만들어져 있다.
용천사는 백제 무왕 원년(600년)에 행은이 창건했다는 절집이다.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불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북적거린다. 자연미도 더 살아 있다. 절집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쉬엄쉬엄 걸으면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산책로 주변에 설치된 크고 작은 돌탑과 장독대, 연못의 용상도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