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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弔花)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4. 4. 2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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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조화(弔花)

 

 

국화를 장례에 쓰는 관습은 구석기 때도 있었다. 1979년 충북 청원에서 4만년 전 동굴이 발굴됐을 때 유골과 함께 국화꽃 가루가 나왔다. 고고학자들은 “구석기 시대 유골에서 국화과·십자화과·운향과·명아주과 열매와 씨앗이 종종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먹다 남긴 꽃씨를 유골에 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6만여년 전 네안데르탈인 무덤에서도 수레국화 등 여덟 종류의 꽃가루가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이 꽃가루가 외부에서 날아든 게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바쳐진 꽃다발에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국화꽃이 조화로 쓰였다는 얘기다. 요즘도 대부분의 빈소에서는 검은색 양복 차림으로 흰 국화를 헌화한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국화는 ‘고결’ ‘경건’ ‘엄숙’을 상징한다. 유럽에서는 삶의 끝을 의미한다. 검은색도 ‘죽음’을 뜻한다. 저승에 가서 고결하고 평화롭게 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또 하나는 향기다. 국화만큼 향이 좋은 꽃도 드물다. 그 향이 장례장의 냄새를 없애주고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동양에서 향을 피운 이치와 닮았다.

중국에서는 모든 생명이 죽어가는 늦가을에 피는 국화꽃을 죽음과 환생의 이미지로 받아들였다. 불로장생의 식물로 여겨 갱생(更生), 장수화(長壽花), 수객(壽客), 부연년(傅延年), 연령객(延齡客)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봄에 움싹을 데쳐 먹고 여름에 잎을 쌈싸 먹으며 가을에 화전을 부쳐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달여 마셨으니 불로초라 할 만도 하다. 국화꽃잎 말린 걸 베개나 이불 속에 넣고 자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했다. 이른바 천연 두통치료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장례식에 국화꽃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구한말 개화기부터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소복에 향을 피우던 방식이 검은 상복에 꽃을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흰색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꽃이 흰 국화밖에 없어서 그냥 쓰게 됐다는 설도 있다.

 

국화는 서리에도 고개를 꺾지 않는 절개와 고결한 향기 덕분에 선비들의 시문에 무수히 등장한다. 시인 이은상은 흰 국화 화분을 집에 들여놓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그 뜻은 ‘세상이 하도 구지분하고 어지럽고 시속이 또한 얕고 엷어 미황(迷徨) 속에서 허덕이므로 나는 물러나 조용히 이 꽃 앞에 와서 탄원하고 질의하고 묵상함으로써 무엇을 얻자 함’이라고 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오래 새겨둘 말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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