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
麗水 紀行(여수 기행)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가, 풍광이 좋은가, 음식이 맛있는가, 사람이 있는가'. 여행지를 선택할 때 필자가 고려하는 사항들이다. 명산(名山)에 가면 그 산을 수십 년간 지켜온 산주(山主)를 만나보아야 하듯이, 어떤 지역에 가면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 원주민을 만나야 여행의 깊이가 생긴다.
여수에는 영광김씨 종택인 봉소당(鳳巢堂)의 주인이 그런 터줏대감이다. 집 앞으로 보이는 예암산(隸巖山)이 2개의 둥그런 유방혈(乳房穴)처럼 보인다. 어머니 젖이 떨어지지 않는 명당에 자리 잡아서 그런 것인가? 봉소당 사랑채는 조선 말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약 150년의 세월 동안 줄기차게 전국의 과객들이 먹고 잠자던 곳이다. 과객 대접에 후하기로 소문난 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살림을 유지하고 있다.
종손에게 여수의 특산품인 '돌산(突山) 갓김치'의 유래를 알고 싶다고 하니까, 다리를 건너 돌산읍의 '무술목'으로 필자를 데리고 갔다. '목'은 노루의 목처럼 길이 좁아지는 곳이다. 무술(戊戌)년인 1598년에 이순신 장군이 막다른 골목 같은 이곳으로 왜선(倭船)을 몰아넣고 공격을 가하자, 왜군들이 허겁지겁 배에서 탈출하여 바로 옆의 소미산(小美山·205m)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왜군이 이 소미산에서 장기 농성을 할 때 당시에 '일본갓'을 심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고 일러준다.
한국 4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인 향일암(向日庵)은 해안가의 아슬아슬한 바위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암자이다. 바위와 해풍은 궁합이 맞으므로 기도발이 발생하는 터가 된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근심 걱정은 바위 절벽의 법당에서 해풍을 맞으면 풀릴 것 같다. 종손이 운영하는 신월동의 호텔(Hidden Bay)에 짐을 풀고 창밖을 보니 수많은 섬이 보초를 서고 있다. 소경도, 노도, 까막섬, 백야도, 개도, 노랑도, 조도, 소죽도, 금죽도, 넙섬, 암목도, 두력도, 부도, 취도, 정개도 등이다. 이 섬들을 보고 왜 이름을 여수(麗水)라고 붙였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항구 앞에 섬이 많으니까 물결이 잔잔해지고, 바다 물결이 호수처럼 잔잔하니까 고울 '여'(麗)자를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