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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는 게으르지 않더라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0. 5.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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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관령에 눈이 내렸다. 함께 고향에 걷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4월 말 눈 내린 대관령 옛길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을 보내며 이런 제목을 달았다. '5월이 오는데 발목이 빠지는 눈이라니'. 마치 봅슬레이 경기장처럼 둥글게 구릉이 진 대관령 옛길에 하얗게 눈이 덮인 사진을 보노라니 이게 한겨울에 내린 눈인지 4월 말에 내린 봄눈인지 알 수가 없다.

봄은 언제나 꽃과 잎의 풍경이다. 대관령엔 눈이 왔지만 비 한번 내릴 때마다 기온이 쑥쑥 올라가면서 아직 터지지 않은 꽃들이 펑펑 터지고, 잎도 쏙쏙 나온다. 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세상 풍경이 더 환해진다. 봄꽃들이 피어나고, 잎들이 꽃보다 더 환하게 피어나는데 새들까지 와서 함께 지저귄다.

어린 시절,마당가와 텃밭엔 참으로 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냥 꽃나무를 심었던 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빈자리마다 과일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열 종류도 넘는 과일나무들이 온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마당 한켠에 목련 한 그루 서 있지 못했다. 앵두나무,매화나무,살구나무,자두나무,복숭아나무,포도나무,사과나무,배나무,밤나무,대추나무,호두나무,산수유,감나무,모과나무,석류나무.지금 이름을 부른 나무들은 꽃이 피는 순서보다 열매가 익는 순서를 따라 표기한 것이다. 꽃이 피는 순서는 매화가 먼저지만 익는 것은 언제나 그보다 작은 앵두가 먼저이다. 산수유도 꽃은 이른 봄에 노란 카스텔라처럼 아주 일찍 피어나지만 열매는 한가을이나 되어야 빨갛게 익는다.

나무도 세상 살아가는 게 사람과 비슷해 부지런한 나무들은 일찍 깨어나 일찍 꽃을 피운다. 매화가 그렇고,벚꽃이 그렇고,진달래며 개나리,복숭아,살구꽃이 그렇다. 그런 나무들은 대부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그런데 다른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운 다음에도 뻐꾸기 소리가 들릴 때까지 여전히 겨울잠을 자듯 기척이 없는 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겨우내 얼어 죽은 게 아닌가 하고 가지를 꺾어보면 어김없이 거기에 물기가 배어있다. 바로 대추나무이다. 다른 나무들이 꽃을 다 피우고,잎을 다 낸 다음에야 대추나무는 뒤늦게 겨울잠에서 깨어나 잎을 피운다. 아주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무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추나무는 뒤늦게 깨어난 대신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쉬지 않고 꽃을 피워(그러니까 봄에 꽃핀 자리에 이미 열매가 어느 정도 굵어진 다음에도 초여름과 늦여름에 다시 꽃을 피워) 그 열매들을 추석 때쯤 한꺼번에 익힌다.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 따라 저 나무는 겨울잠에서 늦게 깨어난다고 말하지만,사실 긴 겨울잠을 자며 대추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더 충실한 여름준비와 가을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장마가 일찍 들면 늦게 핀 꽃에서, 또 장마가 늦게 드는 해는 일찍 핀 꽃에서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조숙한 천재들도 있고,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늦은 만큼 보다 크게 자신을 완성해가는 대기만성형의 대가들도 있다. 사람과 비교하면 대추나무가 꼭 그런 나무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사정이 어려워 잠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런 대추나무와 같은 여름과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잎과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며,그 나무의 생태를 자기 눈으로 깨닫는 것도 재미있는 자연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는 근면이나 성실과 같은 효율로만 따질 수 없는,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과 또 그것의 가치들이 있다. 이제 이 냉기가 물러가면 바로 다가올 이 봄과 여름 사이에도 꽃과 나무들이 그걸 우리에게 말한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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