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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동안거(冬安居)

라이프(life)/레져

by 굴재사람 2010. 1. 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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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걷는 동안거(冬安居)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철학자의 길'이 있다. 평범한 오솔길이지만 찾는 사람이 많다. 괴테부터 헤겔·포이어바흐·루카치·야스퍼스·베버까지 하이델베르크에 살았던 위대한 문인·사상가들의 산책길을 걸으며 그들의 숨결을 더듬는 즐거움 때문이다.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키에르케고르가 거닐던 길,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는 칸트가 거닐던 길이 남아 있다.

▶서양에서 사상가·철학자는 걷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에선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逍遙)학파'라 일컬었다. 그들에게 깨닫는다는 것은 선생과 제자가 함께 학교에서 아폴로 신전 사이를 걸으며 대화하는 것이었다.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다.

▶불교에선 오랫동안 좌선(坐禪)을 깨침의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음력 4~7월 보름, 10월~정월 보름 석달 동안은 안거(安居)라 해서 산문의 빗장을 걸어잠근 채 화두 하나 들고 선방에 들어앉아 정진하는 것이 석가모니 이래 전통이다. 한 치 게으름이나 누구와의 대화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직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번뇌와 망상을 이겨내고 부처님의 진리에 가 닿으려는 피나는 과정이다.

▶실상사 도법스님이 작년 12월부터 지리산 일대를 걷는 '새로운 동안거'를 실험하고 있다고 한다. "앉아 하는 것만이 참선 수행은 아니다. 어떤 틀도 부정하고 모든 테두리를 타파하는 것이 선(禪)의 정신이다." 산문을 나와 길가 자연과 대화하고 지리산 이곳저곳 절 스님들과 함께 호흡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폭설과 영하 10도 추위 속에서도 하루 걷는 거리가 15~20㎞.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도반(道伴)"이라며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리산을 20번 갔다 온 사람은 지리산 박사가 되지만 200번 갔다 온 사람은 "지리산은 보아도 보아도 알 수가 없는 산"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면 지리산의 자연이나, 가도 가도 깨닫기 힘든 부처님의 도(道)나 서로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을 듯하다. 때마침 전국에 올레길·둘레길이 나면서 걷기 바람이 한창이다. 머리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해도 오래 걷다 보면 자기들끼리 싸우다 스스로 정리되곤 하는 것이 걷기가 주는 선물이다. 지리산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주말엔 일상의 화두 하나 들고 가까운 산이라도 걸으며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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