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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드는 날

글모음(writings)/좋은 시

by 굴재사람 2008. 11. 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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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산과 들의 나무들이 황홀하게 물들고 있는 가을입니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나무가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나무를 나무이게 만든 것은 나뭇잎입니다.

꽃이나 열매보다 나무를 더 가까이 하고, 나무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나뭇잎입니다.

꽃은 아주 잠깐 나무에게 왔다가 갑니다.

열매도 나뭇잎처럼 오랜 시간 나무와 함께 있지는 않습니다.

봄에 제일 먼저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한 것도 나뭇잎이고,

가장 오래 곁에 머물고 있는 것도 나뭇잎입니다.
  
 나뭇잎을 뜨거운 태양 볕으로부터 보호해 준 것도 나뭇잎이지만,

바람에 가장 많이 시달린 것도 나뭇잎입니다.

빗줄기에 젖을 때는 빗줄기를 막아주었고,

벌레와 짐승이 달려들 때는 자기 몸을 먼저 내주곤 했습니다.

나무도 나뭇잎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겁니다.

나뭇잎은 '제 삶의 이유' 였고 '제 몸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뭇잎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무는 압니다.
  
 그것까지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섭니다.

나는 단풍으로 황홀하게 물드는 나무를 보며,

버리면서 생의 절정에 서는 삶을 봅니다.

방하착(放下着)의 큰 말씀을 듣습니다.

 

- 도종환 '시인의 엽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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