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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순

글모음(writings)/아름다운 글

by 굴재사람 2008. 4. 2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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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순 
양란이 또 꽃을 피웠습니다. 
하얀 바탕에 보랏빛이 섞인 양란 꽃잎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위문 온 사람이 가지고 온 화분인데 
실내에 두어서 그런지 겨울에도 계속 꽃을 피웁니다. 
만개했던 꽃이 지고나면 그 옆에서 새로운 꽃망울이 솟아오릅니다. 
마치 아이를 가졌을 때 검은 보랏빛으로 변하는 
젖꼭지처럼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이 여기저기 맺혀 
생명의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얼까봐 방안에 들여놓은 화분들과 줄을 타고 오르는 
아이비 잎들과 벽에 걸어놓은 러브체인, 
그리고 손바닥 만한 화분에 들어앉은 석란까지 
다 푸르게 잘 자라며 계절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화분에 물을 주면서 푸르른 빛이 주는 
싱그러움에 마음도 가만히 녹색으로 물이 드는 걸 느낍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똑같은 꽃을 보아도 저하고 보는 곳이 다릅니다. 
제가 화분 주위를 서성거리는 걸 쳐다보시다 
“그 옆에 있는 난좀 봐라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그러십니다. 
같은 꽃을 보아도 어머니는 새순이나 새싹이 올라오는지를 
유심히 보십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제게 
새순 이야기를 자주하셨습니다. 
내가 그 말씀을 듣고 나서도 그냥 흘려보냈던 것입니다. 
내가 활짝 핀 꽃을 보고 아름다워 하고 시드는 꽃을 보면서 
버릴 생각을 할 때, 어머니는 그 꽃이 새순을 내고 있는지
그냥 견디고 있는지를 늘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꾸는 화분은 그저 물이나 주는 정도인데 
어머니가 가꾸는 화분은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지켜보면서 키우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키우는 화초들은 잘 자라는데 
내가 키우는 꽃들이 얼마 못가 시드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부터는 나도 화분의 꽃을 여기저기 살펴봅니다. 
석난에 푸른 연필심 같은 새순이 돋는 게 보입니다. 
연두색 색종이를 모서리부터 돌돌 말아 놓은 것 같은 
아이비 새순이 이파리 맨 끝에서 
뾰족한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보입니다. 
새 순, 새 싹이 솟아나고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어디선가 푸른 생명의 새 순이 
늘 움 솟고 있어야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적인 에너지든 사랑의 싹이든 
안에서 새롭게 꿈틀거리며 순을 내미는 것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습니다. 
꽃을 보되 꽃만 보는 것은 외형만을 보는 것이요, 
열매에 집착하는 것은 욕심으로 보는 것이며, 
빛깔을 중심으로 보는 것은 현상만을 보는 것인데 
새 순을 볼 줄 아는 것은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며 현재와 미래까지를 보는 것입니다.  
- 도종환님의 산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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