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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과 작약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20. 5. 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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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과 작약

1. 작약

 

서양에 ‘꽃 중의 꽃’ 장미가 있다면 동양에는 ‘꽃 중의 왕’(花中王)’ 모란이 있다.

‘목단(牧丹)’에서 우리말로 바뀐 모란은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동양의 정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식물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진평왕 때 중국에서 처음 들어와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농염하게 피는 꽃은 곧잘 성장한 여인에 비유됐으며, 시와 그림에도 자주 등장했다.

모란꽃과 헷갈릴 만큼 비슷한 꽃이 있다. 작약이다.

모란꽃이 시들어 떨어지고 난 유월에 피어나는 작약꽃은 모란과 구별하기 힘들 만큼 비슷하다.

 

유치할 만큼 선명한 원색이나, 꽃송이 안쪽에 다닥다닥 돋아나는 꽃술까지 빼어닮았다.

모란의 고향인 중국에서조차 모란을 목작약, 즉 ‘나무작약’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모란과 작약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모란이 나무인 것과 달리 작약은 풀이라는 점이다.

 

모란은 가을에 잎을 떨구고 줄기는 그대로 남은 채 겨울을 나는 나무지만,

작약은 한해살이를 마친 겨울에 줄기가 시들어 없어지는 풀이다.

 

여러해살이풀인 작약은 땅 속에서 뿌리로 겨울을 난 뒤, 이듬해 다시 새싹을 솟아올리고,

봄 깊어지면 붉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겉 모양은 비슷하지만, 근본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스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저승의 푸르돈 왕은 평소에 헤라클레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힘이 천하 장사요, 죽지도 않는 불사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헤라클레스가 무슨 일로 저승에 들어오려고 했다.
"안 된다! 불사신이 저승에 내려오면 저승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헤라클레스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활을 당겨 푸르돈을 쏘았다.
활을 맞은 푸르돈은 피를 흘리면서 하늘로 피했다. 그리고는 신들의 의사인 패온에게 달려갔다.
"이 상처에는 작약이 그만이지."
페온은 올림포스 산에서 작약을 캐어다 그 상처를 낫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 꽃을 영어로 페오니(작약)라고 한다는 것이다.

 

 

2. 모란

 

모란은 목단이라고도 부른다.

작약과는 꽃은 비슷하지만,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다.

 

모란은 꽃이 크고 화려하여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 한다.

꽃 중의 꽃이니 빼어난 향기를 뿜어내 국색천향(國色天香)이란 별칭을 가졌다.

 

아름다운 꽃을 가꾸다 뿌리는 약재로 쓰이는 모란.

모란 뿌리껍질을 말려 소염 진통제로,

또한 모란 뿌리는 정혈과 고혈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계절의 여왕 5월에 피는 모란은

'부귀화'라는 이름으로 민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꽃말은 부귀. 5월에 피는 모란을 보고 있노라면

영랑 김윤식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라는 시가 떠오른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였던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는
어느 겨울날, 꽃나무들에게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내린다.

다른 꽃들은 모두 이 명령을 따랐으나 모란만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래서 불을 때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화가 난 황제는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시켜버렸다.

 

이후 모란은 ‘낙양화’로도 불렸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모란은 중국 중서부 지방을 원산지로 하는 자그마한 꽃나무다.

 

원래는 약용식물로 재배되어 왔지만, 양귀비를 모란에 비유하는 등

당나라 이후 모란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대상물이 되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의 대표 자리는 모란이 차지했다.

그래서 모란은 예로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다.

 

또한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으로 청나라 이후 중국의 국화로 대접받았다.

1929년에 국화를 매화로 바꾸었으나 당시의 장개석 정부가 타이완에 망명해버리면서

아직 중국은 국화가 정해지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사랑받던 모란은 신라 진평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식물이 언제 수입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모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선덕여왕 1년(632)에 모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져 온다.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선덕여왕의 공주 시절 아명)에게 보인 적이 있다.

덕만은 “이 꽃은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國色)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은 이와 같았다.

 

이렇게 모란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금방 신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 된 것 같다.
신문왕(681~691) 때에는 설총이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했다.

 

 화왕인 모란꽃이 다스리는 꽃 나라에 어느 날 어여쁜 장미와 구부정하고 볼품없는 할미꽃이 찾아와

서로 자기를 써 달라고 했다. 화왕인 모란꽃은 고심하다 충신인 할미꽃을 선택했다는 내용이다.

 

고려로 넘어오면서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모란은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더욱 사랑받게 되었다.

국보 98호인 12세기의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려청자 상감과 여러 생활도구의 꽃무늬는 대부분 모란이 자리 잡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모란을 숭상하는 풍속은 그대로 남았다.

특히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한 민화에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이 가장 흔하게 그려졌다.

 

전통 혼례복이나 신방의 병풍에도 모란은 빠지지 않았다.

모란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작은 나무로 보통 키가 1미터 남짓 자란다.

3~5개의 작은 잎이 같이 붙어 있는 겹잎이며 끝이 깊게 갈라진다.

꽃의 색깔은 붉은색 계통이 가장 많고 여러 원예품종이 있다.

 

〈한림별곡(翰林別曲)〉 의 내용 중에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牡丹)”이 나온다.

조선 태종 6년(1406)에 중국 사신이 황후가 쓸 것이라고 하며 황모란를 요구하였고,

이에 조정은 세 화분에 나누어 심어서 보냈다.

 

또 인조 23년(1646)에는 일본 사신이 와서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요구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열매는 골돌이며 별모양을 이룬다.


《동의보감》에 보면 “모란 뿌리는 어혈을 없애고 여자의 월경이 없는 것과 피가 몰린 것,

요통을 낫게 하며 유산시키고 태반을 나오게 하며 해산 후의 여러 가지 병을 낫게 한다.

고름을 빨아내고 타박상의 어혈을 삭게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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