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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매 야매 올벚에 빠져… 비오는 화엄사의 한나절

글모음(writings)/꽃과 나무

by 굴재사람 2013. 4. 1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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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길 위에서] 흑매 야매 올벚에 빠져… 비오는 화엄사의 한나절

 

 

어쩐지 봄이 순하다 싶었다. 4월 오도록 변변한 꽃샘추위 한 번 없었다. 꽃들도 작년보다 일주일쯤 일찍 피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토요일 태풍급(級) 저기압이 몰아닥친다고 했다. 남쪽에 80㎜ 폭우가 쏟아지고 초속 20m 바람이 불 거라고 했다. 잔가지가 부러진다는 강풍이다. 구례 화엄사로 흑매(黑梅) 보러 가려고 꼽아뒀던 날이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붉다 못해 피처럼 검붉다 해서 흑매라고 부르는 삼백쉰 살 홍매화다.

선잠 자다 새벽에 깼다. 흑매의 선홍빛이 어른거렸다. 여린 홑꽃잎이 비바람에 다 지면 또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여섯 시에 차 몰고 나섰다. 이쯤이면 병(病) 치고도 깊은 병이다. 아홉 시 채 안 돼 화엄사 들머릿길에 다다랐다. 길가 벚나무들이 분분히 꽃잎을 날렸다. 길바닥에 하얀 융단을 깔았다. 저 아래 하동 쌍계사 십리벚꽃길과 섬진강변 벚꽃 터널도 하늘 가득 꽃비를 뿌리고 있을 것이다.

화엄사는 비와 안개와 고요에 잠겨 있다. 일기예보 덕분에 호젓하다. 낮게 깔린 운무(雲霧)가 빗소리까지 빨아들이는지 새소리만 영롱하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 지나는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불가(佛家)에선 벚꽃을 피안앵(彼岸櫻)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세계, 피안을 상징한다. 만월당 처마에 구름처럼 머문 벚꽃이 피안의 황홀을 노래한다. 속세 삼독(三毒)이 가신다.

대웅전 왼쪽 각황전 오르는 계단 너머 흑매가 빨갛게 꽃불을 밝혔다. 잿빛 허공에 새빨간 물감을 양동이로 퍼부은 듯하다. 한달음에 뛰어올랐다. 각황전 오른쪽 모퉁이에 선 흑매가 비바람에 스러지기는커녕 보란 듯 의연하다. 검은 등걸에 검버섯처럼 붙어 있던 청회색 이끼가 단비에 화들짝 초록으로 살아났다. 연분홍 여느 홍매보다 가뜩이나 붉은 꽃잎이 비에 젖어 더욱 선연하다. 송알송알 빗방울 매달아 생생하다. 겨우내 몸속에 가둬뒀던 그리움을 알큰한 향기로 토해낸다.

각황전은 절집 중에 제일 우람한 전각(殿閣)이다. 이층 지붕까지 18m다. 각황전을 숙종 때 다시 지으면서 심은 것이 흑매다. 각황전 일층 처마보다 높게 자랐다. 10m가 넘는다. 화엄(華嚴)은 끝없이 넓고 큰 불법(佛法)을 뜻한다.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쌓아 장엄하게 맺은 결실을 이른다. 그렇다면 각황전 처마에 드리운 흑매는 화엄의 꽃가지다. 300년 넘는 공덕을 쌓지 않고서야 죽은 듯 잠자던 등걸에서 이리도 장엄한 진홍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흔들어 보이니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제자 가섭만이 깨닫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이심전심 뜻 전하는 것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고 한다. 그렇다면 흑매는 메마른 산하에 부처의 자비처럼 찾아 온 봄날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찬미하는 염화의 꽃이겠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대웅전 뒤 계곡 따라 구층암으로 간다. 울퉁불퉁 모과나무 그대로 기둥 삼은 암자다. 장독대 오른쪽으로 대숲 길을 가면 언덕에 길상암이 서 있다. 단아한 한옥을 지리산 자락이 싸 안았다. 하얀 산벚꽃과 노랗고 불그레한 새잎, 새 움이 파스텔화를 그린다. 이름 모를 새가 "쪼로롱 쪼로롱" 맑디맑게 운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기만 해도 퍼드득 날아가 또 운다.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홍매·백매·산수유꽃 만발한 마당 끝, 대숲을 등지고 이끼 낀 고목이 기우뚱 서 있다. 꼬인 듯 뒤틀린 등걸이 강인한 사내의 근육 같다. 살집 없는 몸이 거친 힘을 뿜는다. 사백쉰 살 천연기념물 화엄매다. 매화는 대개 접을 붙여 키운다. 아주 드물게는 사람이나 짐승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을 틔워 자란다. 화엄매가 바로 그 들매화, 야매(野梅)다. 매화의 정령(精靈)이 노고단 넘다 숨 한번 고르고 간 흔적일까. 사람 손 탄 매화보다 꽃이 작고 성겨도 향기는 더 진하다. 올봄엔 개화가 늦어 몇 송이 눈에 띌 뿐이다. 이번 주말 지나야 냉담하도록 꾸밈 없는 아름다움을 떨칠 모양이다.

또 한 그루 화엄사 명목(名木)을 만나려면 일주문을 나서야 한다. 계곡 다리 건너 왼쪽 언덕에 지장암이 있다. 여염집처럼 수더분한 암자 뒤 동백숲 속에 버티고 선 벚나무 하나. 삼백쉰 살 천연기념물 올벚이다. 일찍 거두는 올벼, 올밤처럼 일찍 꽃이 핀다 해서 올벚이다.

벚나무 껍질 화피(樺皮)는 활에 감아 습기를 막고 탄력을 키운다. 칼자루, 마구(馬具)에도 썼던 옛 군수물자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짓밟힌 치욕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화엄사를 다시 일으킨 의승장(義僧將) 벽암 대사가 심은 벚나무 중에 혼자 살아 남은 것이 지장암 올벚이다. 광복 직후 태풍에 줄기가 꺾이고도 두 곁 줄기가 12m로 자랐다. 풍파에 망가진 몸을 시멘트로 때운 채 앳되고 청초한 꽃을 피워 올렸다.

지장암 마루에 앉아 비에 젖은 행색을 추슬렀다. 마당에 이백 살 살구나무가 분홍 꽃을 가득 매달았다. 비 오는 화엄사의 한나절이 꿈결 같다. 우화(羽化)의 꽃비를 맞은 듯했다. 봄이 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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