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흑매 야매 올벚에 빠져… 비오는 화엄사의 한나절
어쩐지 봄이 순하다 싶었다. 4월 오도록 변변한 꽃샘추위 한 번 없었다. 꽃들도 작년보다 일주일쯤 일찍 피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토요일 태풍급(級) 저기압이 몰아닥친다고 했다. 남쪽에 80㎜ 폭우가 쏟아지고 초속 20m 바람이 불 거라고 했다. 잔가지가 부러진다는 강풍이다. 구례 화엄사로 흑매(黑梅) 보러 가려고 꼽아뒀던 날이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붉다 못해 피처럼 검붉다 해서 흑매라고 부르는 삼백쉰 살 홍매화다.
선잠 자다 새벽에 깼다. 흑매의 선홍빛이 어른거렸다. 여린 홑꽃잎이 비바람에 다 지면 또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여섯 시에 차 몰고 나섰다. 이쯤이면 병(病) 치고도 깊은 병이다. 아홉 시 채 안 돼 화엄사 들머릿길에 다다랐다. 길가 벚나무들이 분분히 꽃잎을 날렸다. 길바닥에 하얀 융단을 깔았다. 저 아래 하동 쌍계사 십리벚꽃길과 섬진강변 벚꽃 터널도 하늘 가득 꽃비를 뿌리고 있을 것이다.
화엄사는 비와 안개와 고요에 잠겨 있다. 일기예보 덕분에 호젓하다. 낮게 깔린 운무(雲霧)가 빗소리까지 빨아들이는지 새소리만 영롱하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 지나는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불가(佛家)에선 벚꽃을 피안앵(彼岸櫻)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세계, 피안을 상징한다. 만월당 처마에 구름처럼 머문 벚꽃이 피안의 황홀을 노래한다. 속세 삼독(三毒)이 가신다.
대웅전 왼쪽 각황전 오르는 계단 너머 흑매가 빨갛게 꽃불을 밝혔다. 잿빛 허공에 새빨간 물감을 양동이로 퍼부은 듯하다. 한달음에 뛰어올랐다. 각황전 오른쪽 모퉁이에 선 흑매가 비바람에 스러지기는커녕 보란 듯 의연하다. 검은 등걸에 검버섯처럼 붙어 있던 청회색 이끼가 단비에 화들짝 초록으로 살아났다. 연분홍 여느 홍매보다 가뜩이나 붉은 꽃잎이 비에 젖어 더욱 선연하다. 송알송알 빗방울 매달아 생생하다. 겨우내 몸속에 가둬뒀던 그리움을 알큰한 향기로 토해낸다.
각황전은 절집 중에 제일 우람한 전각(殿閣)이다. 이층 지붕까지 18m다. 각황전을 숙종 때 다시 지으면서 심은 것이 흑매다. 각황전 일층 처마보다 높게 자랐다. 10m가 넘는다. 화엄(華嚴)은 끝없이 넓고 큰 불법(佛法)을 뜻한다.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쌓아 장엄하게 맺은 결실을 이른다. 그렇다면 각황전 처마에 드리운 흑매는 화엄의 꽃가지다. 300년 넘는 공덕을 쌓지 않고서야 죽은 듯 잠자던 등걸에서 이리도 장엄한 진홍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흔들어 보이니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제자 가섭만이 깨닫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이심전심 뜻 전하는 것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고 한다. 그렇다면 흑매는 메마른 산하에 부처의 자비처럼 찾아 온 봄날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찬미하는 염화의 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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