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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먼데서 옵니다

글모음(writings)/아름다운 글

by 굴재사람 2009. 3. 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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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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